溺愛

사랑을 오래 굶어서 허기가 졌다 공허한 절망은 종종 외로움을 타고 사랑에 중독된 자는 사무치는 고독에 익사한다 나는 별의 시체가 낳은 수많은 계집애들 중 하나 죽은 별은 빛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발작하는 우울 지독한 별빛 까마득한 물살에 밀려오는 것은 고독 범람하는 고독 그리움 양질의 애정을 구분하는 방법 같은 건 사치라서 곪아터진 마음을 주워 먹다 탈이...

한 번 흉이 진 마음은 자꾸만 거스러미처럼 툭 일어나고 푸르던 흔적은 노랗게 부패한 몸을 이끌고 투신한다 빛을 잃은 채 얼어죽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들을 보며 썩어가는 가을에는 애도를 표해야 했다 시체별의 빛 아래 누워 잔흔이 꺼질까 뜬눈으로 지새우던 밤 너의 궤도를 공전하다 휩쓸려 죽어버려도 좋다고 종말을 향하는 삶에도 빛이 있다면 푸르게 폭발해버린대도 기...

썩어가는 몸뚱어리들

우리는 형태도 없는 부를 갈구하여 굶주리고 겉모습에 눈먼 자들은 허상에 불과한 음악에 홀려 생쥐떼마냥 소년을 따라간다 온 몸에 탐욕이 들러붙은 오만한 이는 사라진 지 오래 오래된 고급 양주병 내용물은 빛 좋게 숙성된 불행 한 잔 그것은 분명 독은 아니었지만 치사량을 훨씬 넘기는 것이기도 했다 뇌를 가득 채우고 고막을 지독하게 때리던 것들 사라지길 원한 것들...

생량한 일기에 감기에 들지 않기를

청명하고 푸르른 공기를 삼킵니다 구름 없는 하늘도 거리를 두는 계절입니다 때로는 멀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어느새 홍조를 띠는 잎들과 함께 이름모를 꽃들이 만개하였습니다 들꽃이 그리도 어여뻤나봅니다 물결에 조각난 빛들은 어쩌면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아름답고 싶었습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던 때에 말라버린 붉은 잎들을 그러...

수저 앞에서 문득 울음이 터졌습니다

당신은 숟가락을 쓰지 않았다 당신의 앞에 가지런히 놓아둔 수저는 젓가락만이 바쁘게 움직인다 숟가락은 쇠 맛이 나서 싫다고 했던가 차가운 감촉이 이물감으로 느껴진다 했던가 당신과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숟가락 하나는 새것처럼 깨끗했고 어느 순간 나는 수저를 놓을 때 숟가락 하나를 빼고 놓는 습관이 들었다 당신이 떠난 후에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저를...

빗물에 죽어버린

죽음을 애도하는 하늘의 낙루 창 밖을 가득 매운 절상의 흉터 습기찬 웅덩이는 세상을 장악하고 절망한 이들은 그 진창에 투신한다 고요 속의 장례와 숨 쉬는 익사체들 습도 높은 곳에서 썩어가지 말자던 낙뢰만이 유일한 빛과 희망이던 순간 비가 묻은 지독한 숨을 들이키며 그칠 줄 모르고 지겹게도 쏟아지던 창에 부딛혀 죽어가던 것들을 위한 영결식 차라리 영영 그치지...

알려지지 않기를 원한 죽음

날카로운 시침 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그 소리에 어제의 내가 죽는다 그 밝던 달은 며칠 새 시곗바늘에 찔려 죽기라도 했는지 창밖을 장악한 지독한 암흑이 숨통을 죄인다 망에서 삭으로 달이 죽어갈 때에 그 어둠 속에서 나 역시 죽어갈 것이니 나의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행해지기를 죽은 달이 살아나면 암흑은 빛이 되고 빛 속의 장례에는 죽음이 공존한다 적막의 애도와...

지독한 여름의 숭배

때때로 네 생각에 잠들지 못한다 나는 해가 뜨고서야 너의 빛에서 벗어난다 모두가 모두를 그리워하며 불면증에 시달려 그렇게 모두가 햇빛 아래 모여든다면 나는 네 아래에서 그 빛을 맞을 텐데 오로지 나 홀로 잠 못 드는 불면의 때에서 너는 환상에서라도 나를 볼 수는 없었는지 계절을 가득 채운 태양의 열기에 메마르고 그 찬란한 빛에 기어이 실명하더라도 나의 무정...

젊음의 꽃

온 길가에 봄내음이 드리울 때 우리는 꽃피우자 개나리, 벚꽃, 능소화가 가득 채워진 이곳은 바야흐로 청춘의 절정 청춘의 숨결 막 터져버릴 듯 발갛던 꽃봉오리들 아름다움에 과함은 없고 향기에는 끝이 없다고 피지 못하고 재가 된 꽃들을 밟아선 채 남은 시간 온종일 떨어진대도 우리는 그 낙화마저 즐기자 날카롭게 꺾인 줄기가 가슴에 박힌대도 그 정점을 넘어 아름다...

사실은 누구보다 익숙했던

오래된 사진 속 환하게 웃는 두 얼굴 어린아이는 자라 슬픔 어린 얼굴이 되었고 앳된 얼굴의 여인에게는 깊게 패인 주름들이 그 낯선 두 얼굴이 유난히 익숙해서 어쩌면 거울 속 이 얼굴이 더 낯설지 않을까 엄마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나요 저 얼굴에 가득한 행복들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엄마 저 사진 속 여인은 왜 사라져야 했나요 어째서 우리는 각자의 세월을 짊어진...

빗 속의 장례식

사흘 내내 굵은 비가 내렸다 조용히 흘리는 눈물로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울부짖어야 사라지는 고통이 있다 빗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천둥이 내린다 거센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죽어간다 나는 그 무덤가에 숨어 조용히 슬픔을 삭였다 지독히 긴 장마였다

사랑의 동의어

여름 밤 창틈으로 스미는 공기는 축축하고 더운 나의 마음 겨울에도 한동안 그대 때문에 숨이 더웠다 바닷물도 아닌 것이 짠맛이 나서 거듭 마셔도 갈증만 났던 슬픔도 아닌 것이 무겁게 짓눌러 목을 버겁도록 죄이던 무더웠던 날에 모순적이게도 눈이 시리도록 푸르던 하늘 창 밖은 바야흐로 명백한 사랑의 계절 밀도 높게 들어찬 너를 향한 아가페적 감정 그래 너는 여름...